하나님을 모르는 세대에 임하는 재앙 7
등록일 | 2009-03-08
2009년 3월 8일 주일 설교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에 임하는 재앙7 -흑암재앙- 본문: 출 10:21~29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은 동풍으로 메뚜기 떼를 몰고 와서 모든 것을 뜯어 먹어 버리게고 하시고, 서풍으로 몰아내기도 하십니다. 바로가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도 끝까지 거부하는 것은 질기고 질긴 인간의 교만 때문입니다. 결국 아홉 번째 재앙인 어둠의 재앙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고대 사람들이 숭배하던 신들 중에 가장 큰 신은 태양신입니다. 애굽 사람들도 태양신 ‘라(Ra)’를 가장 큰 신으로 섬겼습니다. 태양 곧 빛이 인간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빛은 어둠을 밝혀줄 뿐 아니라 열을 제공하며 만물을 자라게 하고 생명을 유지하도록 해줍니다. 그러나 어둠은 두려움, 공포, 죽음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을 가장 큰 신으로 여겼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내밀어 애굽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 만한 흑암이리라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내밀매 캄캄한 흑암이 삼 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21~22절) ‘더듬을 만한 흑암’이라는 것을 봐서 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의 어둠이 아니었습니다. 눈앞에 큰 벽에 가로막혀 있는 것 같은 어둠이었습니다. 그동안 여덟 가지 재앙으로 온통 누더기가 된 애굽을 삼일 동안이나 무서운 어둠이 짓눌렀습니다. 어둠이 임하면 좋은 것, 나쁜 것 등이 상관없습니다. 모두 의미가 없게 됩니다. 어둠에 묻히면 어떤 의미도 영향력이 나타내지 못합니다. 이 어둠이 우리 삶을 지배한다면 어떨까요? 아무리 소유가 많더라도 깊은 어둠 가운데 있다면 지옥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지금도 어둠에 살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살았으나 죽은 것처럼 사는 인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무엇을 얼마만큼 소유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비추어져야 합니다. 그 동안은 사람들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 (23절) 사람들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둠의 결과로 모든 인간관계가 끊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볼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둠 속에 혼자 있는 것 같은 상황이 삼일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처소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자기 한 몸도 지탱하기 힘들었습니다. 누군가 가까이에 있지만 서로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어둠은 인간을 철저하게 격리시켜 버립니다. 인간의 삶에 어둠이 임하면 아무리 주변에 많은 사람이 있어도 고독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왜 우리 인생이 외롭고 고독할까요? 어둠 때문입니다. 내 마음, 심령을 덮고 있는 어둠의 세력 때문입니다. 이 어둠은 어떻게 물리칠 수 있을까요? 빛이 있어야 합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사라지고 외롭지 않게 됩니다. 다시 일어서 당당하게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럼 이 어둠을 물리치는 빛은 어디에 있습니까? 23절을 다시 보십시오.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분리시켜 버린 어둠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있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언약, 말씀이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습니다. 모두가 격리된 것처럼 처소에 누워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유로웠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둠, 우리 삶에 있는 어둠은 어떻게 몰아낼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2절)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십니다. 빛은 어둠을 몰아냅니다. 예수님이 우리 삶의 어둠을 몰아내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빛이 임합니다, 생명을 얻습니다. 빛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서 내 삶의 모든 어두움을 몰아내고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어 주십니다.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 모세가 이르되 왕이라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제사와 번제물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겠고 우리의 가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 중에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며 또 우리가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나 (24~26절) 어둠 속에서 바로는 포기하지 않고 또 다시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양과 소는 두고 어린이는 데리고 가라는 것입니다. 아직도 주도권을 포기하지 못하는 바로를 보면 한심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로의 타협안은 그럴듯합니다. 애굽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자기 자식들이 고된 노예 생활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재산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자신과 재물 중 하나만 택하라는데 자식을 버리고 재물을 택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을 바로가 노리고 있었습니다. 바로는 자식을 떼어 놓든지, 재물을 떼어 놓든지 어떻게 해서든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과 떼어 놓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빛을 비추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속한 모든 것, 돌멩이 하나, 풀한 포기까지도 빛을 비추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나 혼자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속한 모든 것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유물을 분리시켜 하나님의 은혜를 떼어놓으려 했습니다. 사단이 이렇게 간교합니다. 내게 속한 것 중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분 짓게 해서 분리시킵니다. 편견, 편애를 갖도록 조장합니다. 그러고는 최종적으로 어느 것 하나만 선택하라고 부추깁니다. 속지 마십시오. 우리의 모든 것이 다 소중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내게 속한 모든 것에 임합니다. 어느 것 하나 소홀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좋고 싫은 것은 내 기분일 뿐입니다. 그 기분에 따라 분리시키고 나면 은혜는 사라집니다. 기분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덜 좋은 것, 부족한 것도 용납하십시오. 함께 있어야 하고 함께 가야 합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도 포기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26절을 보면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는지 알지 못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렇습니다. 내게 속한 것 중에 어떤 것을 하나님께 쓰실지 모릅니다. 나의 핸디캡조차도 하나님은 귀하게 여기십니다. 불편하고 거추장스럽다고 내 삶의 열등한 부분을 함부로 다루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내 모든 것을 사랑하십니다. 실수와 허물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내 삶의 전부를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 보내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바로가 모세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떠나가고 스스로 삼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네가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 모세가 이르되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내가 다시는 당신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리이다 (27~29절) 바로는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고 합니다. 바로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는 없습니다. 자기가 내린 저주로 죽음의 길로 가고 마는 것입니다. 29절을 보면 모세가 바로의 말을 확인합니다. 자신을 저주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속상해 하지도 마십시오. 자기 저주에 자기가 넘어질 뿐입니다. 어둠의 세력이 속삭이는 타협에 속지 마십시오. 어둠의 세력이 위협하는 소리를 두려워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인정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오 주여, 우리 삶의 어두운 부분에 주의 빛을 비추소서! 이 세상 어두운 곳에 주의 빛을 비추소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온 세상에 비추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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